하루
Poetic2020. 5. 25. 02:42추위를 몰고 온 바람은 온기를 서슴없이 가져가고 틈새 없던 손에 냉정함만 남기고 어느새 하수구 속으로 빨려간다.
허무와 황당이 뒤섞인 생각은 물 밖에 없는 광활한 바다에서, 다시 바다가 그리운 물이 되어 손에 냉정함만 남기고 떠날 생각한다.
시시각각 변하여 들어오는 길을 지나 가로등 빛을 밟으며 산만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멈추어 선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려고 창문가에 앉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본다.
제 각각 갈 길을 위해 스쳐가는 사람들, 언젠가 한 번쯤은 얼굴을 맞댈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눈을 비비며 내려간다.
구질구질한 하늘과 땅, 비는 내리듯 말 듯 내려다본다.
아무 뜻 없이 또 길을 걷는다.
무심히 있는 일기장을 펼쳐본다.
억세게 나빴던 한 페이지가 펼쳐진다.
11월 며칠의 일기였다.
우산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초라한 빗방울 몇 조각이 옷에 스며드는 날,
밖에 울려 퍼져 들어오는 시끄러운 소리,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엿은 지저분하게 발을 잡는다.
홀로 남겨진 일기장도 한 장 쓰이면 폐품 속에 파묻혀 나올 날을 기다릴 것 같다.
열쇠고리 없는 문은 혼자 흔들려 간다.
만지면 닳아 없어지는 볼펜을 끼워두고 끝을 맺는 일기장에선 보기 싫은 말들만 적혀 있다.
일기장이 정말 지저분하고 보기가 싫어지는 건 왜 일까? 싫은 날이 되려 한다.
빠르게 일기장을 접어 두고 싫은 날이 되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가려한다.
때론 싫은 날도 있고 좋은 날도 있지만 일기장엔 계속 싫다만 적혀있다.
정말 지저분한 일기장이다.
며칠 동안 계속되던 그칠 것 같던 비가 일기장 하나로 망가진다. 낙천적인 성격도 이런 날은 필요 없을 것 같다.
기침이 나오려 한다. 싫은 것을 뱉어 내기 위해서…
물이 흐른다.
틈새 사이로 사라진 물처럼 보인다.
물을 보면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문득 '우화 등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우화 등선은 우화라고도 쓰이는데, 이 단어 속에는 우주 순환의 논리가 숨어있다.
높은 곳에서부터 흐르는 물은 얼굴에 닿아도 또다시 흐른다.
언젠가 산에가서 시냇물에 손을 씻는다면 다시 산에 가서 손을 씻는다면, 그 물에 손을 씻을 수 있다.
물은 순환하고 있다.
돌고 돌고 언젠지는 모르지만 틈새로 빠져나간 물이 다시 손에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도 순환하고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정말 순환이 있다면 사람들도 순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게 아니라도 사람들은 이미 지겹게 순환하고 있다.
집에서 집으로 이렇게 보면 물처럼 순환하고 있다.
우주에 별들이 돌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순환하고 있다.
하루는 순환이 많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좋은 일과 싫은 일, 싫은 일과 좋은 일, 서로 변하는 날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날, 순환 사이에 끼여서 하루의 해가 저물어 간다.
정말 싫은 하루다.
그 어디에도 끼어있지 않은 하루, 아무렇게 보낸 이 하루가 정말 한심스럽다.